당신은 아주 작은 톱니바퀴이다
유통업은 기본적으로 아주 단단한 시스템에 따라 굴러간다. 당신이 없어도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는 얘기다. 직원 한 명이 그만두거나 해서 데미지를 받지는 않는다. 매니저 달지 못하면 그저 부품처럼 쓰여지다가 나오는 것이다. 모든 회사가 그렇지 않으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SPA에서 매니저 못 달고 나오면 인생 초반기의 커리어에 아주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다.
전문성의 결여
SPA브랜드는 매니저 직급 달아서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전문성이란 건 없다. 박스 까고 싸고 포스 좀 만지고 고객 서비스 좀 하는 거다. 말이 좋아 판매직이지 판매에도 전문성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명품브랜드에서 SPA경력 잘 안 쳐주는 이유이다. SPA에서 매니저였어도 명품 브랜드에서 평사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전직이 쉽지 않다.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붙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회사에 종속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계속 흐른다. (여자들의 경우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하다.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건 안다. 그러나 지금도 연락할 정도로 친했던 여자 동료들이 내게 매번 하소연 하던 내용이었다)
비체계적인 인사
유럽 기반의 브랜드들은 일반 판매사원(파트타임부터)으로 입사해서 중간 매니저까지 직함 달려면 3-4년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동안 버티면 반드시 매니저가 되느냐? 아니다. 매니저 눈에 들어야 하고 사내정치를 잘 해야 승진할 수 있다. 5년을 일했어도 밉보였으면 매니저 못 한다. 판매직 어디나 그런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SPA는 아예 운영방식 상 바꿀 수 없는 태생적인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개인을 평가할 수 있는 정량적인 판단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명품관이라든지 자동차 세일즈맨이라면 판매 개수가 기록될 거고, 그게 인사고과에 연결될 확률이 높다. 많이 파는 사람이 더 빨리 진급할 것이다.
그런데 SPA는 실적이 지점단위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합산된 판매량과 판매액은 나올 지언정 누가 몇개를 얼마 팔았는지 알 수 없다. SPA매장의 업무 분야가 오로지 고객 서비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매장 뒤에서 창고를 정리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매장에 나와있기는 하지만 판매와 무관한 업무를 한다. 이 모든 게 팀 단위로 돌아간다. 따라서 오로지 판매량과 판매액으로만 실적을 평가한다면 고객 서비스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유리해지는 불공평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평가를 매니저의 정성적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루에 옷 한 벌도 못 팔아도 매니저 눈에 들고 정치 잘 하면 승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매니저들은 누가 잘 하는지 어렴풋이 판단하고 있고, 또 매니저 눈에 든 애들이 잘 파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어렴풋한 판단이다. 평소에 잘 못파는 사람도 운이 좋아 판매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매니저에게 보일 수 있다. 이게 몇 번 이어지면 매니저는 '아 잘 파는 애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실적이 개판이라도 '잘 파는 인상'만 가지고 있어도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경우가 그렇다. 나는 고객 서비스는 괜찮았지만 뒷심이 약해서 판매로 연결시키지는 못하는 사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 매니저가 나와 있을 때 보여주기식 서비스를 했고, 정치도 잘 했다. 나는 내 선배들보다 먼저 매니저 후보에 들었다.)
반대로 말하면 매니저에게 밉보이면 승진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 된다. 몇 년을 일했든, 당신이 그 매장의 오픈멤버이든 상관 없이 말이다.
사원급의 인사고과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간 매니저이다. 물론 점장이 본사로 인사를 올리지만 거기엔 중간 매니저들의 의견이 크게 개입되어 있다. 설령 중간 매니저의 의견이 틀렸을지라도 점장은 보통 중간 매니저의 의견에 따라준다. 점장의 입장에선 언제 그만 둘지도 모르는 직원보다는 자신의 직속부하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점장은 매니저들과의 관계에 트러블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점장의 인사고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이클의 부재
고정된 근무 스케쥴이 없다. 월간 스케쥴(또는 주간 스케쥴)에 따라 근무 일자가 정해진다. 그마저도 결원(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또는 매니저 팀의 거절할 수 없는 요청(정성적 평가) 때문에 유동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 시간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규모 있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주5일 근무, 주말 휴무라는 고정된 스케쥴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사이클을 만들 수 있다는 된다. 사이클이 있으면 공부를 하든, 전직을 위한 준비를 하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풀야근을 해도 주말은 쉬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 일 없는 한 그 사이클은 유지된다. 한 번 돌아가는 사이클은 관성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유지할 수 있다.(매일 운동을 조금씩 한다면 오히려 운동을 거르기가 더 어려운 것처럼)
그런데 스케쥴이 일정치 않으면 사이클이 존재할 수 없다. 사이클이 없으면 계획 자체를 수립하기 어렵다. 계획을 세워 어찌 실행한다고 해도 유지하는 일은 힘들다. 의지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의지는 의지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애초에 그런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SPA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낮은 소득의 굴레
SPA바닥 소득이 다 비슷하다. 처음에는 거의 최저임금만 지급한다. 그런데 이건 알아야 한다. 업무가 상대적으로 덜 힘들어 보이고 기업문화가 유연해 보일수록 적게 준다. 그 돈으로는 투자는 커녕 저축하기도 힘들다. 집세, 통신비, 식사비, 교통비 모두 제하면 50만원 모으기도 힘들 것이다.
말인즉, 20대를 다 보낼 때까지 돈 만져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매니저 달아야 겨우 저축 시작할까. 그마저도 매니저 달았을 때 이야기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도중에 나가면 그 어떤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적시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박봉을 받으며 계속해서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확률이 높아진다.
몇몇 기업들은 정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홍보한다. 사이트에 걸어 놓은 외국인 할머니, 할아버지 직원들 사진에 혹해서 지원하는 이십대 초반의 직원들 많다. 혹은 나처럼 늦은 나이에 조급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들 안정성이라는 그럴듯한 허울에 혹해 들어온다. 망하지는 않겠구나. 적게 벌어도 오래 일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메리칸 어패럴은? 포에버21은? 거기서 일하던 직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당신이 지원할 회사가 망할 확률이 0%이고 정년이 없는 기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당신의 미래 모습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정말로 일이 좋아서 계속 남아 있는 것일까? 그들도 해외여행 다니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을까? 혹시 그 나이에도 일을 해야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이동
과거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것은 브랜드 매출의 65%가 온라인몰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오프라인 매출의 감소는 내부에서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온라인 판매에 투자할 예정이었다. 돈 안되는 매장의 정리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마 매출이 몇 곳의 플래그쉽 매장도 판매 채널이라기보다는 쇼룸으로 용도 변경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프라인 매장의 판매사원이 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차라리 규모가 작은 온라인 쇼핑몰의 사원으로 입사하는 편이 앞으로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 추후 임금상승률이 높은
- 그나마 전문적인(회사가 망해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 경력을 인정해 주는
일을 알아봐야 한다. 최소한 셋 중에 하나는 충족해야 한다.
이미 일하고 있다면
젊은 나이라면 그만 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고정된 스케쥴이 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내어 전문성을 가진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만두기 애매한 조건이라면 고정수입을 유지하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사원급이라도 최소한 무엇이 잘 팔리고 안팔리는지, 물건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SPA에 다니면서 자신의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물론 회사에는 금지하고 있다.